앰뷸런스는 나에게 맡겨라 - 장 라레
앰뷸런스는 나에게 맡겨라 - 장 라레
  • 의사신문
  • 승인 2012.01.0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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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우선순위는 계급과 상관없이 다친 정도가 기준”

나폴레옹이 만났던 가장 훌륭한 의사 - 장 라레(Dominique-Jean Larrey)

어느 날 루이 15세가 어느 의사를 찾아갔대요. 그런데 왕은 말에서 내리다 발목이 삐었다며 말했어.

“나를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대우하겠지?”

의사는 이렇게 말했어.

“황송하오나 특별히 대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왕은 은근히 화가 났지만 표정을 감추고 다시 물었어.

“왜 그런가?”

의사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어.

“저희 병원에서는 아픈 사람 모두를 왕처럼 대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의사 모로 드 바르(Morro de Bar-Le-Duc)가 했던 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뛰어난 이발의사 앙부로와즈 파레가 세를 6세에게 했던 말을 바르가 흉내낸 것이래.

“아빠!! 이발의사가 뭐예요.”

그건 나중에 파레 이야기할 때 자세히 말해줄게. 간단히 말해, 옛날에는 내과의사, 외과의사 말고도 이발의사라는 직업이 있었어. 그러나 이발의사라는 직업은 귀족들 사이에 가발이 유행하면서 사라지게 돼.

하여튼 의사라는 직업이 생긴 이래 의사들의 괴로움 중의 하나가 이런 문제였어. 다들 조금 더 특별한 대우를 받길 원했기 때문인데, 병원에서 치료는 둘째 치고 치료순서부터 시끄럽기 일쑤였어. 보통 때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큰 사고가 났을 때는 더욱 문제가 되었지. 전쟁 중에는 서로 먼저 치료해 달라는 통에 병원은 언제나 아수라장이었어. 서로 계급을 들이대며 의사에게 먼저 봐 달라고 했기 때문이었지.

어떤 순서로 치료하면 될까 고민하다, 군의관 장 라레는 이런 생각을 했어.

“그래, 계급이랑 상관없이 다친 정도에 따라 색깔로 표시하자. 색깔 순서대로 하면 되잖아.”

그래서 장 라레는 신호등처럼 빨강, 노랑, 녹색 색깔로 된 ‘트리아지’라고 하는 역삼각형의 표지를 만들어 심한 정도에 따라 치료를 시작하는 순서를 매겼어.

그러나 장 라레의 가장 큰 업적은 구급차인 앰뷸런스를 만든 일이야. 라레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기껏해야 다친 사람을 다른 사람이 부축하거나 업어서 옮기는 것이었어. 그러다 보니 전쟁 중에 부상당한 사람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쟁터에 그냥 버려진 경우가 많았어.

장 라레는 말이 끄는 들것 수레를 만들었어. 장 라레의 수레는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병사들의 사기를 한껏 드높여 프랑스 군이 승리하는데 기여했어. 처음에는 바퀴가 두 개였는데, 나중에 장 라레는 개량하여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사륜차로 만들었어.

나폴레옹이 시리아로 쳐들어갔을 때 이야기야.

“라레가 어떡하는지 보자. 사막에서는 말이 달릴 수 없어.”

장 라레는 말 대신 낙타를 이용하여 앰뷸런스를 만들어 총칼보다 시리아 군대를 놀라게 했지. 라레는 안장의 권총집을 수술도구와 붕대를 담은 운반용가방으로 바꾸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신경 썼어. 사람들은 장 라레가 만든 앰뷸런스를 `날아다니는 야전병원'이라고 불렀다고 해.

“아빠! 라레가 참 똑똑해요.”


나폴레옹 군대 군의대장으로 적군도 치료했던 진정한 의사
앰뷸런스·트리에지 환자분류법 개발 응급의학 크게 기여


그렇지. 그러나 장 라레는 머리만 뛰어난 의사가 아니었어. 의사로서의 책임감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어. 나폴레옹이 시리아를 지나 이집트로 원정했을 때 이야기야. 나폴레옹은 많은 의사와 학자를 데리고 이집트로 쳐들어갔어. 그러나 결국 영국군의 공격에 포위된 프랑스 군대는 철수하느냐, 마느냐 기로에 섰지. 장 라레는 철수할 것을 주장했어. 그러나 므누장군은 나폴레옹에게 고집부렸어.

“죽는 법은 알지만 항복하는 법을 모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문을 마지막 까지 지키겠습니다.”

대부분의 의사와 학자들은 프랑스로 돌아간 상황이었어. 쥐가 옮기는 페스트란 병이 퍼져 이집트엔 온통 아픈 사람들이었고, 장군마저 페스트에 걸려 죽기 직전이었어. 그러다 보니 어느 의사도 이집트에 남으려 하지 않았지.

“므누장군과 함께 남겠습니다.”

장 라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장군을 치료하기 위해 참 의사의 길을 선택했어. 결국 장 라레는 므누장군을 완치시키고 이집트를 마지막으로 떠났다고 해.

나폴레옹의 마지막 전투 때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 영국의 사령관은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을 흘리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웰링턴장군이었지. 웰링턴장군이 전투가 끝날 무렵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에서 장 라레가 부상병을 치료하는 것을 보고는 모자를 벗으며 말했어.

“저 군의관이 있는 쪽으로는 포를 쏘지 마라. 참다운 의사의 명예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장 라레는 결국 워털루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인에게 잡혀 바로 사형선고를 받았지. 이제 장 라레는 죽게 되었어.

“아빠! 어떡해요.”

그때 장 라레의 강의를 들었던 프로이센 군의관이 라레를 알아보았어. 그는 곧장 프로이센 장군을 찾아가 말했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던 군의관을 살려주십시오.”

블뤼허장군은 군의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

“라레는 프랑스 의사가 아니라 세계의 의사입니다. 라레는 저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장군은 개인적인 감정을 말하는 군의관을 이해할 수 없었어.

“군의관!, 정신 차리게나. 라레는 유명한 의사일지 모르나 우리의 적이야. 알겠어?”

군의관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지.

“장군님, 아드님이 지난 전투에서 부상당해 프랑스로 잡혀갔었지요. 그때 아드님을 수술하여 살려준 의사가 바로 라레입니다.”

장군은 깜짝 놀라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어. 자신의 아들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렇게 친절하게 치료해 준 의사가 바로 라레였다니….

그래서 라레는 호위대의 보호를 받으며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다나.

장 라레는 뛰어난 의사의 조건이 신의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어.

스무 해만에 나폴레옹의 시신이 프랑스로 돌아올 때였어. 눈보라 치는 바닷가에 나폴레옹 시대의 군의관 복장을 꺼내 입고 하루 종일 기다려 나폴레옹의 시신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어.

나폴레옹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지. 하하?.

“군위관 라레남작에게 십만 프랑을 남기노라. 라레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훌륭한 남자다.”

“어? 아빠가 좋아하는 술도 나폴레옹이에요.”

그래? 정말 브랜디 이름이 나폴레옹 코냑이구나. 다시 나폴레옹 시대로 가야겠네. 나폴레옹은 아들이 없어 고민했대요. 그러다 오스트리아 왕녀와 다시 결혼했는데, 드디어 늦둥이 아들을 보게 되었지. 그해 신기하게도 밤하늘에 기분 좋게 살별이 자주 나타났고, 포도 농사도 잘 되었고 품질도 최상이었다네. 이렇게 좋은 일이 겹치자 술을 제조하는 사람들이 이 해를 기념하기 위해 술 이름에 나폴레옹이라고 붙이자고 그랬대.

그래서 나폴레옹 코냑이야. 알겠니?

장 라레 (Dominique Jean Larrey)

1766년 7월 8일 출생하여 1842년 7월 25일 사망했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외과의사로 보댕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보르도로 이사했다. 13살 때 부모를 잃어 톨루즈에서 외과의사를 하는 삼촌 집에서 자랐으며 6년 이상 의사의 도제로 일한 후 파리로 가 오텔 디외에서 외과 의사 드소(Pierre-Joseph Desault) 밑에서 공부했다. 1797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 군대의 수석군의대장을 했다. 처음으로 앰뷸런스를 개발했으며, 트리에지라는 환자 분류를 만들어 응급의학에 기여했다. 1809년 바그람 전투에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 워털루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풀려났다. 이후 진료와 저술 활동을 하였다. 1842년 리옹에서 사망했다.

김응수 (한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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