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적금리 왕진 1971년 가을간매리에서 적금리를 가려면 산모퉁이를 돌아가야 합니다.지름길은 산 중턱을 넘어가는 길입니다.환자가 생겼다고 지서장한테서 전갈을 받고 나는왕진가방을 들고 산 중턱을 오르기로 했습니다.군의관 훈련시 독도법을 배울 때처럼 산에 올라갔습니다.가을 산에는 밤나무도 있고 붉은 낙엽이 밟히기도 했습니다.얼마 후 적금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마을은 하얀 연기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꼬불거리는 마을 길을 따라서 나는 한 농가에 들어갔습니다.사랑채로 안내된 나는 환자가 되시는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팔십쯤 되신 분은 바지

대학로(大學路)의 나무 플라타너스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가지마다 많은 새 생명을 싹틔웠다베트남 전선에서 용감했던 김수현* 전함의 그 주인공 닮은 1969년 해병 2여단 청룡부대 이규학 해병 소위 닮은 빛나던 모습들그 소중한 잎들이 산화(散華)했다목숨과 피와 땀으로 75년간에 이룬 우리의 기적의 역사들리냐? 바쁜 도시의 소음 속에서 나는 힘찬 전동차 소리보라! 빌딩이 솟아오른 한강 변을밤이면 은하수 물결 같은 자동차 불빛을BTS(방탄소년단)가 세계를 휩쓰는 무대에서누가 대학로의 옛 고난을 기억하랴 1963년을 회상하자 독재에 항거하던

늦가을 숲속에서 바위틈에서 부르는 내 노래는 흐느끼는 것이 아니다열매를 새들에게 다 내어주고 빈 가지로 서 있는이름 없는 한 그루 나무를 위하여영혼을 떠나보내고 잠든묘비 아래의 육신에게 드리는 노래그것은 슬퍼서가 아니다신생아들을 위한 해피버스데이의 노래높은 하늘에서 미소 짓는 초승달을 벗하며밤이슬을 마시며 부르는 감사의 노래다끝없이 피비린내 흘리는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손을 위한평화를 부르는 기도이다정적을 깨는 가느다란 목소리로사슴가족과 토끼들을 위하여 부르는숲에서 서로 만나서 풍요로워지는 이웃을 위한 노래맑은 공기와 빗 물에 감사하

빙하수(氷河水)를 마시면서 바라는 것은 우리가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빙하가 녹아내리며 만들어낸 대지의 운명과도 같다기본 언어(言語)와 인지력(認知力) 마저 잃어버리는 것은빙하가 지나간 땅에 수목이 우거지고 생명들이 번창하며 살다가산불이 붙어 덤불에 섞여 다 타버리는 것과도 같다수은, 납, 아밀로이드 플라크 같은 불순물이 쌓이고순조로운 신진대사가 차단되어 뇌의 기능을 잃어가는 것은 단풍이 물들고 오곡이 추수되던 마을에 폭풍이 불고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이 물살에 떠내려가 사라지는 것과도 같다빙하가 녹아내려 아름다운 폭포수와 강을 이루고

흐느끼는 소리 1.얼굴에 덮개 쓰고 기둥에 묶인 죄수는 나트랑(Nha Trang)에서 저지른 잘못으로 사형 받는 백마사단 전 수색대원군목사의 기도 소리가 끝났을 때 그는 울고 있었을까?심장의 표적을 꽂아주는 군의관의 손은 떨렸다탕탕탕 수십 발 총성이 동시에 울리고 사망을 확인하는 손히포크라테스 선서와 무관한 손은 떨렸다네로 황제 닮은 현장의 증인들“살인자를 죽여라!”라는 사람들은 누구냐?2.사망이 확인된 주인 없는 시신 해부학교실로 보내지고 정중한 기도 후 공부가 시작된다반 세기 지난 후 백발이 된 그 학생들은 작은 추모비석을 교실

무지개가 내려온 숲 소나기가 떠나면서 무지개가눈부신 꽃팔을 내렸다누가 타고 왔을까?녹음이 짙은 숲에 붉음이 피어오르고 있다가보자, 걸음이 빨라진다눈을 맞추는 꽃사슴, 걸음마를 배우는 새끼오리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풍요로워지는 연못가로만남과 삶과 헤어짐이 슬프지만은 않은 무성한 숲으로나무와 억센 풀과 야생화를 길러준 바람이 지나가고무지개는 점점 다가 오고 있다 숲과 천국을 이어주는 무지개는하늘에 떠있다꼭 잡아두고 싶은 오월에 있다

고마운 마리아진료실 책장 위에 놓인 소녀의 머리를 본다멕시코 산골에 살던 마리아 곤잘레스를 본다그녀의 보드랍던 고운 얼굴을 만지면 열두개의 신경줄이 나오고 붉은 동맥이 박동하던 푸른 정맥이 달리던 구멍을 본다검정 볼펜으로 측두에 선을 그으면 골절을 수긍하던 배심원의 눈빛도 보이고 환자의 고통도 보인다의학을 배우는 자나 의문이 있는 모든 사람들다 같이 마리아를 본다우리 그녀를 볼 때면 맑은 시냇물 흐르는 소리 들리고 오색 찬란한 무지개가 뜬다맛있는 음식도 먹는다 손을 움직이며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 글을 쓰고 남을 가르치고 창조도 하

개구리의 탈출 엊그제 저녁 축축한 패디오 창가에서 어미 개구리 유리에 붙어서 방안을 들여다보더니오늘은 이층 계단에서 아기 개구리가 눈알을 굴린다메러디스 빅토리호* 김치 6 아이처럼 깡충 내 컵 속에 담긴다카불의 데드라인이 삼 일 남았는데 용케 비행기를 탔구나나도 어제 꿈 속에서 또 여권을 챙기고인천공항 다리가 끊기어 부산으로 갈까 오산비행장으로 갈까 진땀을 흘리다가 깨어났는데이 맑은 새 아침에 어린 개구리 버지니아 자유의 땅을 찾아왔구나드론, 디지털 지혜로 하늘로 날아온꽃사슴처럼 연약한 연두색 살갗 터질듯한 어린 눈망울에 생명을 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