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수 선배를 처음 본 건 80년대 후반 내가 본과 2, 3학년이었을 때로 기억한다. 그는 1975년 서울의대 수석 졸업에 이어 그해 의사국가고시까지 수석을 차지했던 수재였다. 이른바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소유자였는데 교과서를 뇌에 사진처럼 찍어놓은 다음 그걸 시험시간에 머릿속에서 한 장 한 장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아, 내가 지금 컨닝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본인이 화들짝 놀라기까지 했다는 전설이 있다.당시 미국에서 종양 내과 전문의로 바쁘게 살아가던 원 선배를 초청한 곳은 의대 기독교 학생 연합이었다.

의사수필동호회 는 작년에도 어김없이 수필집을 냈다. 이 모임에서는 지난 51년간 연말이 되면 빠짐없이 책을 한 권씩 발행해 왔다. 막내로 합류한 나는 이번이 네 번째 참여다. 17인의 의사들이 두어 편씩 글을 써서 해마다 정성스럽게 책으로 엮는다. 뒷면에 책값도 박혀있고 서점에서 판매도 하지만 대개 지인들에게 선물로 보내드린다. 팔순의 우리 어머니는 특히 이 책을 좋아하셔서 항상 열심히 읽으시고 나름의 감상평까지 전해주신다. “너 이번엔 재미없게 썼더라.” 그 책에 실린 내 글을 보고 얼마 전 어머니가 툭 던지신 말이다.

발단은 ‘모리사키 서점’이었다. 어느 날 병원 우리 과의 L 선생이 의국 책상 위에 툭 던지고 간 영어소설 제목이 바로 이었으니까. 기관의 중요 보직자로 최선을 다하느라 늘 기진맥진 혹은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 둘 중 하나인 사람이 ‘제법 힐링이 되었다’는 독후감을 전하면서 놓고 갔으니 그 책에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L 선생이 출장길 외국 어느 공항에선가 샀다는 얄팍한 영어책에는 차 한 잔과 클래식 기타 선율을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가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극적인

그때 ‘아르페지오(Arpeggio)’에 대해 글을 쓰고 있었다. 아르페지오는 ‘화음(和音)’을 한꺼번에 소리 내지 않고 하나씩 차례로 연주하는 기법을 말한다. 아울러 창립 35년 된 서울의대 클래식 기타 동아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난 화요일 낮, 아르페지오 소속 의대생들이 원자력병원을 찾아 로비에서 멋진 음악을 들려주었다.이 동아리와는 1대, 2대 회장을 지낸 창립 회원들이 모두 현재 우리 병원에서 근무한다는 인연이 있다. 환자와 보호자들을 위해 점심시간 음악회를 한번 열어줄 수 있겠느냐는 선배의 부탁을 후배들이 흔쾌히 수락한 것

문 앞에서의 서늘한 예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병원에 출근해 내 방 문을 여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 낡은 천장이 무너져내려 질퍽거리는 흙과 날카로운 돌조각들을 책상 위에 어지러이 토해놓았고, 가로세로 1미터 가량의 뻥 뚫린 천장 구멍으로는 먼지 가득한 공기가 연신 오르내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컴퓨터는 주인을 대신한 가여운 희생양이었다. 수년 전 장마철의 어느 아침에 일어났던 일이다. 병원 건물이 워낙 낡은 탓에 배수에 문제가 생겼고 며칠 동안이나 고였을지 모르는 빗물이 무게를 견디다 못해 내 방 천장에서 기어이 자폭을

그 노인이 첩으로 얻은 여인은 젊고 예뻤다. 평소 두 아들에게 자기가 죽고 나면 여인이 다시 좋은 배필을 만나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하라고 당부했다. 막상 임종에 이르자 섬망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노인은 살아있는 부인을 자기 시신과 함께 묻으라는, 그러니까 ‘순장(殉葬)’하라는 황당한 명령을 내리고 죽었다. 아비의 유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자식들 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었으나, 정신이 온전할 때 남기신 말씀이 진짜라고 장남이 강력히 주장함에 따라 새어머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훗날 이웃 나라와 전쟁이 발생하여 군대에 징집된 두 아들

‘주례사 비평’이란 말이 있다. 남의 결혼식 주례사에 대한 품평이 아니라, 문화 예술 분야에서 마치 주례사처럼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는, 하나 마나 한 일부 논평과 비판을 뜻한다. 과도한 의미부여, 상찬(賞讚), 일방적인 선전과 홍보 따위가 이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문화 예술이 아닌 실제 결혼식 주례라면 그런 요소들이 도리어 핵심 콘텐츠가 되는 법이라 대개의 주례사는 도덕 교과서 같기 마련이고, ‘천편일률’이란 소릴 듣는다. 주례 선생님을 모시고 기껏 엄숙하게 예식을 올린 부부가 정작 주례사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살다 보면 울고 싶은 날이 있고 그런 날 문득 듣고 싶은 음악이 있다. 내겐 ‘자클린의 눈물’이 그런 음악 중 하나다. 원래는 첼로 곡이지만 리처드 용재 오닐이 연주하는 비올라 선율이 더 마음에 든다. 그 슬픈 곡을 처음 알게 된 계기가 바로 옛날 란 드라마에 카메오로 깜짝 출연한 용재 오닐 때문이었으니까. 드라마에서도 세계적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로 나온 그는 지휘자 강마에 앞에서 ‘자클린의 눈물’을 연주하다가 실력이 하나도 안 늘었다고 혼이 난다. “연주 여행 핑계 대고 어디 놀러 다닌 거 아니냐”고 능청스럽게

70년대 연세대 앞 신촌의 주택가는 그리 잘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지금의 현대백화점 자리엔 오래된 재래시장이 있었는데 입구에 늘어선 어물전과 닭을 직접 잡아 팔던 닭고기 가게 때문에 길바닥은 늘 질척했다. 신촌 기차역 부근 바람산 중턱에 있었던 우리 집에서 국민학교에 가려면 개량 한옥 빼곡한 골목을 지나 비린내 물씬 풍기는 시장을 가로질러야 했다. 어른들 눈에 비친 동네와 거리는 칙칙한 회색빛이었겠지만 호기심 가득한 아이에겐 신기하고 재미있는 알록달록한 빛깔의 등하굣길이었다. 그 길에서는 번데기 장수 할아버지와 뽑기 아주머니가 호

“의사가 살리겠습니다.” 지난 6월 여의도에서 전국 의사 총궐기대회가 열렸을 때 많은 의사들이 들고 있던 손팻말 글귀다. 원래 이 행사의 주제가 ‘정부가 죽인 대한민국 의료를 되살리자: 의사가 살리겠습니다’였고 이 가운데 뒷부분만을 구호로 옮긴 것이다. 환자 곁을 무책임하게 떠난 의사들이 가뜩이나 못마땅하던 참에, 본인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문구에 분노가 치민 한 대학교수가 교수들이 보는 어떤 신문 칼럼에서 의료계의 신뢰가 추락했다며 독한 표현을 했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사태의 진상이 어떠

‘나는 용서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써보라고 교수가 지시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학생들은 이내 저마다의 경험과 결심을 원고지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적막한 강의실에 사각사각 오직 연필과 펜 구르는 소리만 들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몇몇 학생이 머리를 감싸고 뛰쳐나갔다. 글을 쓰다 말고 눈물을 흘리는 아이도 있었다. 한참 글을 써 내려가던 누군가는 한숨을 쉬며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맺기도 했다. ‘나는 도저히 용서 못 한다.’ 소설가 김영하가 대학 강단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 겪었던 에피소드다. 글이 가진 놀라운 힘을

의료계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빠진 듯하다.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가 안 보이는 의사들과 정부의 갈등 상황이 암울하게 이어지면서 매일 한숨이 늘고 무력감은 더해간다. 지난주 참석했던 의사 문학동인 모임 ‘박달회’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공의 사직서 처리 문제로 고민하는 한 수련병원 선생님의 하소연에 더하여, 이른바 ‘휴학 호소인’인 우리 집 의대생 아들의 답답한 근황이 이어지자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때 한 원로 교수님이 화제를 돌리셨다. 당신께서는 요사이 정치적 관심은 일절 끊고 대신에 서양 예술사를 집중해서 공부

차 사장은 진단검사의학과에서 쓰는 의료기기와 그 시약을 수입해서 병원에 유통하는 회사를 운영한다. 30여 년 전 전공의 시절 처음 만났을 때 난 그에게 범상치 않은 면모가 있음을 직감했다. 당시 작은 회사 영업사원이었던 그는 전공의들에게까지 정중하고 친절했다. 최근에야 모든 국민이 알게 됐지만, 서열 엄격한 병원에서 가장 말단에 위치한 인턴, 레지던트들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노예’ 비슷한 존재로 종종 자기를 비하한다. 그렇게 자긍심 낮은 존재에게까지 그는 교수님 대하듯 매번 자기가 아는 진단검사 분야 제품 정보와 업계 현황을 최선을

좀 난해하지만, 예술 활동의 최종 결과물로서 우리 눈에 보이는 물리적 실체보다 처음 그 작품을 잉태한 아이디어나 실행 계획 따위의 관념적인 부분에 더 의미를 두는 현대 미술의 한 장르를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라 부른다. 작년에 리움 미술관에서 한국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던 마우리치오 카텔란 역시 개념미술가라 말할 수 있다. 당시 전시되었던 카텔란의 여러 작품 중 단연 화제를 모았던 건 이란 제목의 바나나였다. 갤러리의 널찍한 한쪽 벽면 중앙에 공업용 덕트 테이프로 척 붙여놓은 그 바나나는 2019년 마이

해마다 5월에 열리는 과기부 장관배 탁구대회는 좀 독특한 면이 있다. 과학기술계 혹은 정보통신 유관기관만 참여할 수 있으며 개인전 없이 복식 5게임으로 승부를 겨루는 단체전이다. 상대가 바뀔 때마다 매번 선수 명단을 달리 제출하는데 눈치작전이 꽤 치열하다. 우리 팀 최약체 조가 상대 팀 최강 조를 만나는 게 전체적으로 팀의 승리확률을 조금이나마 높이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어차피 버리는 패니까 차라리 적군의 대장을 껴안고 장렬하게 전사하란 의미로 최약체 조를 ‘논개 조’라 부르기도 한다. 또 하나의 특징은 경로사상이 약간

중구·성동구 갑 지역에서 이번에 당선되어 국회에 다시 들어가게 된 민주당 전현희 변호사는 원래 치과의사 출신이다. 그는 치대에 입학했던 첫 학기에 기초 생물학 과목을 수강해야 했는데 그게 대형 강의실에서 의예과 학생들과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담당 교수님은 매번 학생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출결 관리를 철저히 하시는 분이었다. 전현희 의원이 불리는 순간이면 ‘히읗(ㅎ)’ 음가가 ‘이응(ㅇ)’으로 약화 되고, 자연스럽게 연음 법칙이 적용되면서 이름이 다소 민망한 비속어처럼 들리기 일쑤였다. 일부 남학생들은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고 교

거짓이 없이 참된 마음을 ‘진심(眞心)’이라고 한다. 몇 년 전부터, ‘탁구에 진심인 편’ 혹은 ‘빵에 진심인 편’이라는 식의 표현이 유행인데, 특정한 취미나 기호 따위에 몰두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과도한 몰입을 놀리려는 의도로 쓰일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긍정적 뜻으로 사용될 때가 더 흔하다. ‘진정성’이란 단어의 용례도 비슷할 것 같지만 이건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아직 표준어가 아니라는 소리다. 하지만 워낙 ‘진정성’이란 말을 쓰는 데에 진심인 사람들이 많으니 사전에 등재될 날이 곧 올

“여러분이 내 몸에 메스를 대는 그날이 바로 나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호스피스 병실로 찾아온 의과대학생들에게 62세의 말기 췌장암 환자 리허전(李鶴振)은 이렇게 말했다.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에 콧줄까지 꽂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몸을 의대에 해부용으로 기증하겠다고 결심한 터였다. 자신의 육신을 가장 잘 보존한 상태에서 학생들이 실습하도록 해주고 싶었기에 그는 모든 항암 치료를 거부했다. 타이완의 츠치(慈濟) 의대에서 있었던 일로, 이때 병실을 방문했던 의대생들은 자신

미술 선생님이었던 작은 어머니 손을 잡고 초등학교 1학년 여름에 난생 처음 미술관에 가보았다. 덕수궁 석조전에서 국내 최초로 프랑스 화가 ‘장프랑수아 밀레’ 작품전을 하고 있었다. 어린 아이가 ‘만종’, ‘이삭 줍는 사람들’ 같은 그림이 세계적인 걸작인지 알 리가 있겠는가. 그저 화가가 시골 아줌마, 아저씨들을 푸근하게 잘도 그렸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유명한 그림이란 걸 곧 알게 됐다. 유심히 살펴보니 동네 이발소며 허름한 식당이며, 여기저기에 밀레 작품들이 꽤 많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개 싸구려 복제품이거나 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남편의 기척이 들리기 무섭게 벼락같이 달려 나간 아내는 그에게 다정하게 키스를 퍼붓는다. 이어서 그의 챙 넓은 모자와 두터운 벨트, 또 두루마기처럼 생긴 외투를 차례로 받아준다. 긴 장화를 벗기는 과정은 좀 귀찮았겠지만 그래도 현관 의자에 남편을 앉히고서 무릎 꿇은 채 기다란 신발을 하나씩 당겨서 빼주는 아내. 여기까지만 보면 집에서 부인에게 극진히 대접받는, 참 부러운 남편의 모습이다. 그러나 곧 반전이 이어진다. 뜻밖의 공손한 서비스에 남편이 아직 우쭐해 있을 때, 아내는 곧바로 그에게 핑크색 꽃무늬 앞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