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의학적 원리의 치매진단검사를 한의사에게 허용하려던 계획을 철회했다. 하지만 한방치매건강증진 시범사업은 여전히 강행한다는 입장이어서 안전성과 효과성이 입증되지 않은 한방치료요법에 국민의 혈세를 투입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매우 크다.
서울시는 총 예산 5억여원을 투입해 서울시한의사회와 협업으로 ‘어르신 한의약 건강증진 시범사업’을 실시한다고 지난 8일 밝혀 논란이 커졌다.
시범사업은 한의사들에 의해 의학적 원리의 사전·사후 스크리닝 검사(치매MMSE, 우울증GDS)를 시행해 치매를 진단한 후, 인지기능저하자(치매고위험)와 우울감이 있는 노인은 1:1 생활·행태개선교육, 총명침, 한약과립제 투여 등 8주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일반 어르신은 뇌 기공체조, 치매예방교육, 회상교실 등 4주 프로그램을 실시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서울시는 올해 시범사업을 실시한 뒤 결과를 평가하여 확대여부를 검토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시가 한의사들에 의한 의과 치매 진단 검사를 허용하는 것도 모자라 이를 토대로 의학적으로 안전성과 효과성이 입증되지 않은 총명침, 한약 등의 한방 치매 치료까지 국민의 혈세를 투입해 실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의료계는 큰 우려를 나타냈다.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서울시의사회에 이어 대한의사협회, 의협 비대위, 대한신경정신과학회, 대한정신건강학회, 대한노인정신의학회, 대한치매학회, 대한신경과학회 등 전문가 단체들이 연이어 긴급성명을 발표하고 시범사업 계획을 철회할 것을 촉구했다. 다른 의사 단체들도 시범사업에 대해 강력히 문제를 제기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MMSE, K-DRS 등의 의학적 치매 진단 기준을 한의사들이 무단으로 사용할 경우 의과 행위를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법률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어 현재 의료계에서 서울시에 대한 법적 고발까지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의료 전문가단체의 우려와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자 서울시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해 시범사업 계획을 일부 수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시는 15일 오후 서울시의사회에 ‘2016년 서울시 어르신 한의약 건강증진 시범사업 협조요청’ 공문을 통해 △치매선별용 간이정신상태 검사(MMSE-DS)를 활용하여 보건소 주관 하에 실시(치매센터 협조) △치매지원센터의 기존 검사자(인지기능저하자)들에게 한의약건강 프로그램 안내 △노인우울증 검사(KGDS)·보건소 주관 하에 MMSE-DS 시행 시 같이 검사 등의 내용을 담은 사업수행 절차 및 방법을 알려왔다.
또한 △치매로 진단 분류된 경우 치매지원센터 수탁병원, 지역사회내 병의원에 치매원인확진 검사를 연계 △인지기능저하자(치매고위험군)의 경우 한의약건강증진프로그램 연계 △노인우울증 검사결과에 따라 정신건강센터, 병의원 연계 등 검사결과에 따른 조치 계획을 밝혔다.
이 같은 서울시 공문 내용에 따르면 ‘어르신 한의약 건강증진 시범사업’ 계획은 한의사들에게 현재 의과 의료행위로 분류된 치매 검사를 허용한다는 당초 계획에서 크게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일 시범사업 계획을 밝힐 때만 해도 서울시는 한의사들에 의해 사전·사후 스크리닝검사(치매MMSE, 우울증GDS)를 실시토록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서울시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한의사회도 “현재 한의대에서 치매 관련 교육을 충분히 하고 있고, 치매관리법에 따라 치매환자 치료관리의 법적지위를 보장받으며, 노인장기요양보험 치매등급진단 시 MMSE 등을 통해 소견서를 발급하고 있으므로 한의사의 치매 진단이 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서울시가 이번 공문을 통해 치매진단 검사를 한의사에게 허용하지 않고, 치매환자가 아닌 치매 전 인지장애가 있는 고위험성 노인만을 의뢰하며, 우울증으로 진단받으면 한의원이 아닌 병의원으로 의뢰하는 것 등을 원칙으로 명시함으로써 한의사의 의학적 치매 검사가 불가하다고 쐐기를 박은 것이다.
서울시 건강증진과 관계자는 15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의료계의 우려가 커짐에 따라 시범사업에 관한 서울시의 입장을 다시 정리한 공문을 서울시의사회와 서울시한의사회에 전달했다"면서 “이에 따라 치매센터의 협조를 받아 검사를 실시한 뒤 노인들에게 한의약 건강증진 프로그램을 안내할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센터의 협조를 받아 치매 진단 검사를 실시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서울시가 이번 시범사업을 실시함에 있어 한의사에 의한 치매 진단 검사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울시가 한의사에 의한 치매 검사는 허용하지 않기로 했지만 시범사업은 강행한다는 입장이어서 효과성이 입증되지 않은 사업에 적잖은 예산을 투입함으로써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특히 현재 서울시광역치매센터와 각구 치매센터가 운영되고 있지만 서울시는 이번 시범사업 실시에 앞서 이들 유관 치매 전문기관들에 시범사업 내용에 대해 논의한 적도 전혀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번 시범사업에 앞서 특별히 치매센터 측과 논의한 적은 없고 서울시한의사회 산하 각구 한의사회별로 공모를 진행해 시범사업을 실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구 고령화로 치매 질환이 급증하는 현 시점에 서울시가 국민의 세금을 투입해 치매 관련 사업을 벌이면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경청하지 않을 뿐더러 치매 질환 자체에 대해서도 너무 가볍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 있는 대목이다.
노만희 대한개원의협의회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15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의료계의 치매 약물과 치료법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임상시험과 연구결과에 의한 것이지만 한의학적 치료는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면서 “서울시가 노인분들을 돕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국민의 혈세를 좀 더 치료효과가 입증된 쪽에 쓸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 조정훈 위원(신경과 전문의)은 “한의계는 MMSE가 서양의학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MMSE는 건강보험에 등재되어 수가코드까지 등록된 의과의료행위이며 심지어 검사방법도 미국 신경과 의사가 개발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치매는 인지기능 저하로 인한 질병으로 혈액검사나 MRI검사까지 필요한 경우도 있는데, 이는 한의사가 절대 할 수 없는 의료행위”라면서 “한의계는 한방치매치료요법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검토 결과, 전부 대체요법이거나 부분적 또는 일시적 효과, 또는 케이스스터디일 뿐인 것으로 확인됐다”라고 설명했다.
조 위원은 “안전성과 효과성이 크게 부족한 한방 치료요법에 서울시가 국민의 세금을 투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번 시범사업의 진행과정을 면밀히 지켜본 후 불법성이 발견될 시 법적 고발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