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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자성어와 달리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말에는 어원에 해당하는 그럴싸한 스토리가 없다. 그저 ‘각자 어떻게든 살아남기를 도모한다’라는 글자 그대로의 해석만 전해질 뿐이어서 한자를 익히는 재미가 덜하다. 중국 고사엔 아예 등장하지 않는 이 문구가 신기하게도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서 몇 차례 발견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별다른 대비가 없었던 조선은 순식간에 초토로 변했다. 그러나 이듬해 명나라가 파견한 원병에 힘입어 빼앗겼던 성을 하나씩 탈환하기 시작한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점령했던 평양성을 우리가 되찾은 것도 이때다. 왜군은 평양성을 내주고 철수하면서 만행을 저질렀다.
“평양 싸움에서 패한 왜적이 분풀이로 도성 백성을 다 죽이고 물러갔는데 이런 일이 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남쪽 동래, 부산, 김해 지역 백성들에게 이를 미리 알려줌으로써 각자 살길을 도모하도록(使之各自圖生事)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1594년) 9월 6일에 나오는 구절이다. 역사상 최초로 ‘각자도생’이 한자로 적혀있다. ‘앞장서서 도망친 비겁한 군주’란 선입관 때문에 선조가 왜적 침공 시에 백성들에게 던진 무책임한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해당 실록 문장을 꼼꼼히 읽어보면 이 장면은 우리의 반격 상황이며 전략적 의도까지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날의 실록에는 ‘비변사에서 왜적을 이간하는 문제를 아뢴다’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조선 후기 최고 의결기관으로 지금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국정원 역할을 함께 하던 비변사가 왜적의 잔인함을 여기저기 은밀하게 소문내자고 건의했고, 이를 선조가 다시 국왕 지시사항으로 포장하여 경상도에 내려보냈다는 기록이다. 이 흉흉한 소문을 듣고 왜적들과 그들에게 잡힌 조선 포로들이 각각 ‘폭동이 일어나지 않을까’ 혹은 ‘갑자기 죽이지 않을까’ 의심하다가 내부 분란이라도 일어나길 바랐다는 내용이 실록에 이어진다. 그러니까 ‘각자도생’은 그냥 평범한 서술이었고 이 표현을 빌미로 선조를 비난하는 건 좀 과한 일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각자도생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까닭은 따로 있다. IMF나 미국발 금융위기같이 경제적으로 직격탄을 맞거나, 혹은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같은 대형 사고를 겪을 때마다 국민들은 정부를 바라본다. 최선을 다해 피해자를 따뜻하게 보듬고, 우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기민하게 현실성 있는 대책을 세워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가 번번이 실망과 좌절로 바뀌었기에 대한민국은 언젠가부터 다들 각자도생을 입에 달고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다. 피곤하고 암울한 각자도생이 아닐 수 없다.
의대정원의 무리한 증원으로 촉발된 소위 ‘의정(醫政)갈등’ 상황이 이제 2년째로 접어든다. 환자는 환자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저마다 절박한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섰다고 탄식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특히 아직 의사가 채 되지도 못한 의대생들이, 한창 공부하고 실습해야 할 병원 주변과 강의실 언저리를 배회하다가 마침내 어쩔 수 없이 각자도생을 고민하는 지경에 이른 21세기 대한민국의 ‘비현실적 현실’에는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어 오른다.
사직 전공의들은 그나마 의사면허증을 들고 동네 의원에 취직이라도 하지만 의대생들이 택할 수 있는 각자도생의 길은 훨씬 제한적이다. 봉사활동, 취미생활, 여행, 교수 연구실 보조, 카페 아르바이트, 기타 자기계발 등의 임시방편들로 더 이상 시간을 메워가기가 지겹고 괴로울 것이다. 결국 남학생들은 군의관 되길 포기하고 급히 사병으로 군대에 지원하고, 많은 의대생이 가능한 단계까지 앞다투어 미국 의사시험(USMLE)을 치르려 한다.
작년에 본과 4학년 올라가자마자 휴학한 아들을 둔 나는 오늘도 여전히 ‘투쟁’ 혹은 ‘저항’ 중인 대다수 의대생이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을까 애가 탄다. 특히 휴학 지속 찬반으로 나뉘어, 돈독했던 동급생들의 우정마저 금이 가는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속이 터질 것 같다. 그간 곪아 온 온갖 의료계 문제들을 언제까지 이 아이들이 다 짊어지게 할 것인지 정부와 시니어 의사들이 원망스럽고 나 또한 부끄럽다.
최근에 의과대학 동기들 40여 명이 하와이로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5년이나 미뤘던 졸업 30주년 여행을 이제야 갔다 온 것이다. 비록 함께하진 못했지만, 난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과 여행 후기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순간순간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을지 짐작됐다. 젊은 날 함께 했던 6년여의 시간이, 평생을 지속하는 보물 같은 우정이 되었음을 우리 동기들은 모두 절절히 체감한다.
그런 점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생각하며 고뇌하는 의대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 길이 행여 ‘의대 동기’라는 소중한 벗들까지 포기하는 방향이라면 인생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고. 국가적, 사회적 대의명분도 좋지만, 나의 선택으로 인해 친밀하고 끈끈했던 여러 관계들이 망가진다면 그것은 ‘진짜로 생명을 도모하는’ 방법이 아닌 ‘가짜도생’ 같다고.
나는 조만간 의과대학 학생들이 손잡고 강의실로 전부 돌아오길 기도한다. 이를 위해 꽉 막힌 의료계 문제의 물꼬를 먼저 터야 할 주체는 정부다. 소신 있는 의사결정이 어려운 혼돈의 시기지만 그래도 최소한 학생들만큼은 정부가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된다. 알맹이 없는 시늉만으로 시간 끌지 말고 이미 엎지른 물이라도 최대한 주워 담고 또 조금이라도 다시 뜨는 노력과 성의를 보여 달라.
각자도생은 원래 가치중립적인 말이었다. 요즘엔 가족 내에서 서로 독립적 생활을 영위하며 책임과 의무를 일방적으로 전가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긍정적인 용례도 눈에 띈다. 늦었지만 아직은 학생들의 지난 1년 각자도생 연습을 이렇게 주체성을 강화하는 쪽으로 좋게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엄포고령 제5조의 정신세계를 정부가 끝내 탈피하지 못하고, 이미 번 아웃된 학생들의 자아와 그들의 교우관계, 심지어 사제관계까지 더 분열된다면 정말 돌이키기 힘든 비극적 각자도생의 시대가 다가오지 않을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