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삶 ⑧ : 전쟁영웅
그림 속의 삶 ⑧ : 전쟁영웅
  • 한성구 서울의대 명예교수
  • 승인 2025.04.04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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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는 전쟁터에서 무엇을 그렸는가 “오토 딕스, 살아남은 자의 얼굴”

전쟁이 터지면 화가도 징집당해서 전쟁터에 간다. 1차 세계대전 때 독일도 그랬다. 모든 전쟁은 비참하고 잔인하지만 특히 패전국의 국민은 승전국의 국민보다 훨씬 가혹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그래서 패전국의 화가들이 전쟁의 상처를 표현하는 그림이 더 절절한 경우가 많다. 패전국인 독일의 전쟁영웅으로 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화가는 전쟁 후 어떻게 살았을까? 패전한 나라의 무공 훈장이 마음의 빛나는 영광을 되새기게 해주었을까?

오늘의 주인공은 ‘오토 딕스(Otto Dix)’이다. 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던 화가 중에 살아남은 화가들은 대부분 비전투원이었다.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에리히 헤켈(Erich Heckel)’ 등은 다 앰뷸런스 수송하는 일을 했었다. 전투 요원이 됐던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나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같은 빛나는 재능을 가진 화가들은 전사하는 바람에 더 이상 새로운 그림을 볼 수가 없었다. 오토 딕스는 기관총 사수로 전투 요원이었는데 총 6번이나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했지만 회복되자마자 또 전쟁터에 나갔다. 이 전쟁 영웅은 결국 철십자 무공 훈장을 받았다.

전후, 많은 독일의 화가들은 전쟁의 상처를 나름대로 표현했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감수성이 뛰어나고 따라서 불안하고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에 전쟁의 상처도 훨씬 크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럼 이 강골인 전쟁 영웅은 어땠을까? 우선 자화상부터 보자.

▲ (왼쪽부터) 첫 자화상은 전쟁터에 가기 직전, 그래도 평화를 원하는 자화상이다. 두 번째 그림은 거의 야수의 모습이고, 그 이후 기관총 표적지에 자신을 그렸고 비인간성의 자화상을 그렸다.

첫 자화상은 1912년 그린 것으로 전쟁터에 징집되기 직전으로 보인다. 매우 굳은 표정에 양 미간을 찌푸리면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잔뜩 긴장한 모습이지만 손에는 꽃을 쥐고 있다. 이 청년도 평화를 원하는 것이다. 두 번째 자화상은 1914년 전투 기간에 그린 것이라 급히 그린 것이 역력하다. 감수성 높은 청년은 어디 가고 저 모습은 살아남아야 하는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기관총 사수가 된 화가는 총의 표적지로 자화상을 그렸다. 언제든 기관총으로 벌집이 될 자신을 그린 듯하다. 마지막 그림은 그 당시 유행했던 큐비즘 양식(입체주의)으로 그렸는데 인간이 아니고 로봇 같은 느낌을 준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으려면 인간성은 버려야 하는 것 아닌가.

전쟁이 끝나고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가 되면서 자유가 찾아왔다. 화가들은 전쟁의 상처를 표현하면서 개인의 감정과 내면을 표현했고 대중이 호응해서 오토 딕스를 비롯한 막스 베크만, 에리히 헤켈, 에른스트 키르히너 등은 아주 인상적인 작품을 발표하면서 미술대학의 교수 역할도 할 수 있었다.

이 화가는 직접적으로 전쟁을 그린 그림들도 많은데 그중 두 점을 보면 1차대전 때 독일군은 독가스를 썼는데 바로 그 장면을 그렸다. 

▲ (왼쪽부터) ‘ 독가스 살포 (1924)’와 ‘전쟁(1929~31)’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첫 그림은 불길한 전쟁터로 행하는 병사들, 중간 그림은 독가스 살포로 모두가 죽은 전쟁터에 방독면을 쓴 병사가 있고 밑의 그림에는 죽은 병사들의 시체들이 보인다. 오른쪽 그림은 사지에서 전우를 구출하는 전쟁영웅을 그렸는데 저 얼굴이 화가 본인의 얼굴이다. 오토 딕스는 진짜 전쟁 영웅이었다.
▲ (왼쪽부터) ‘ 독가스 살포 (1924)’와 ‘전쟁(1929~31)’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첫 그림은 불길한 전쟁터로 행하는 병사들, 중간 그림은 독가스 살포로 모두가 죽은 전쟁터에 방독면을 쓴 병사가 있고 밑의 그림에는 죽은 병사들의 시체들이 보인다. 오른쪽 그림은 사지에서 전우를 구출하는 전쟁영웅을 그렸는데 저 얼굴이 화가 본인의 얼굴이다. 오토 딕스는 진짜 전쟁 영웅이었다.

첫번째 작품(좌측)에서는 방독면을 쓴 군인은 인간성이 말살됐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다음 그림으로 ‘전쟁’이라는 대작은 현재 드레스덴에 있는데 좌측 그림은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그렸다. 아주 불길하고 음습한 느낌을 준다. 가운데 그림은 참혹한 전쟁터에 살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지옥을 그렸고 오른쪽의 그림은 영웅적인 군인이 전우를 구출해서 살아났음을 보여준다.

1920년대 전반에 이 화가가 그린 그림들을 보자. 여전히 무표정한 자화상, 정신과 의사인 ‘하인리히 슈타델만(Heinrich Stadelmann)’의 초상, 앞니가 빠진 어머니와 아이, 기둥서방(포주)과 매춘부를 보면 상처받고 곤궁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전혀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짜 인생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그림들이다, 괴물처럼 살아남았던 전쟁 영웅에게도 전쟁은 아주 큰 상처로 남았음을 알 수 있다.

▲ (왼쪽부터)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무표정한 자화상,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신과 의사, 앞니가 빠져 합죽한 어머니와 배만 나온 아이, 기둥서방과 매춘부. 위 작품은 모두 1921~22년 사이에 그려졌다. 
▲ (왼쪽부터)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무표정한 자화상, 어쩔 줄 몰라 하는 정신과 의사, 앞니가 빠져 합죽한 어머니와 배만 나온 아이, 기둥서방과 매춘부. 위 작품은 모두 1921~22년 사이에 그려졌다. 

그 시기 오토 딕스와 비슷한 연배이자 전쟁의 경험을 같이 겪었던 화가들의 자화상을 보면 이들이 감정과 심리를 공유했음을 알 수 있다. 막스 베크만의 자화상은 절대로 웃지 않고 온 상을 찌푸리면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자화상은 베크만의 특징이다. 키르히너는 워낙 불안정한 사람이어서 훈련소에서 공황발작을 일으켜서 귀향 조치를 받았다. 전쟁터 근처에도 못 가봤지만 군복을 입은 자화상에는 오른 손목이 절단된 모습으로 나온다. 에리히 헤켈의 자화상은 심신이 다 기진맥진한 모습이다.

▲ (왼쪽부터) 베크만의 자화상은 불편한 표정에 경직된 자세로 담배를 들고 있어서 삶이 힘들어 보인다. 키르히너의 자화상은 군복을 입었는데 손목이 절단되어 있고, 마지막 헤켈의 자화상은 심신이 다 탈진된 모습이다.
▲ (왼쪽부터) 베크만의 자화상은 불편한 표정에 경직된 자세로 담배를 들고 있어서 삶이 힘들어 보인다. 키르히너의 자화상은 군복을 입었는데 손목이 절단되어 있고, 마지막 헤켈의 자화상은 심신이 다 탈진된 모습이다.

그런데 바이마르 시대는 짧았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독일은 급격한 전체주의로 빠진다. 전쟁의 상처를 표현하고 불안과 불확실성을 그리던 화가들은 퇴폐미술로 낙인이 찍힌다.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공공건물에 걸렸던 그림들은 철거되고 불태워졌다. 그 자리에는 히틀러가 바라던 ‘건강한 미술’, ‘독일의 이상’을 표현하는 그림들이 걸렸다. 1차 대전을 겪었던 독일의 ‘퇴폐미술가’들은 대거 망명을 택했다. 에른스트는 일찌감치 파리로 떠났고 베크만은 암스테르담으로, 키르히너는 스위스로 도망갔다. 그런데 저 강골 전쟁 영웅은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퇴폐미술로 낙인찍힌 채 그 모든 핍박과 수모를 겪으면서 묵묵히 독일에 남아 있었다.

전쟁의 막바지에 오토 딕스는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혐의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이었다. 증거가 있으면 처형될 일인데 이 강골 화가는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었다. 처형을 면하는데 아마도 무공 훈장 수여자라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형을 면했다고 집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내려진 처분은 군대로 징집되는 것이었다. 1차대전의 영웅이 2차대전에 나이 쉰이 넘어서 또 징집을 당했고 게다가 배속된 곳은 나치돌격대였다. 히틀러 암살 모의 연루자에게 나치 돌격대라니···. 총알받이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이 강골은 나치돌격대에서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 독일이 항복할 때 나치돌격대는 프랑스군이 접수했는데 이 나이 든 돌격대원이 어떤 사람인지 프랑스군은 알지 못했다. 나치 돌격대이니 전범 취급을 받고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 (왼쪽부터) 1945년 포로수용소에서의 자화상과 1969년 손자와 함께한 할아버지 자화상. 딕스의 많은 자화상 중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은 것은 저 자화상이 유일하다.
▲ (왼쪽부터) 1945년 포로수용소에서의 자화상과 1969년 손자와 함께한 할아버지 자화상. 딕스의 많은 자화상 중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은 것은 저 자화상이 유일하다.

이 화가가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시기에 나이 든 나치돌격대원으로의 자화상을 그린 것이 남아 있다. 귀밑머리와 수염이 희끗희끗한 돌격대원은 산전수전 다 겪고 달관한 모습이다. 여기까지의 인생은 정말 험난했었고 죽을 고비가 많았다.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이후 이 화가의 후반의 삶은 비교적 평탄했었다.

말년에 행복한 표정으로 손자를 안고 있는 자화상을 보면 보는 사람은 이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하는 그런 인생을 산 화가였다.

▲ (왼쪽부터) Dr. Hans Koch의 초상(1921), ‘Mrs. Koch’에서 ‘Mrs. Dix’로 이름이 바뀐 부인
▲ (왼쪽부터) Dr. Hans Koch의 초상(1921), ‘Mrs. Koch’에서 ‘Mrs. Dix’로 이름이 바뀐 부인

[사족] 이 화가는 바이마르 시절 비뇨기과 의사를 알게 됐다. 딕스의 그림을 좋아하고 후원하다가 친구가 되었다. 이 의사 부부와 화가가 여행을 같이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의사 부인과 화가의 사랑이 시작됐다. 결국 의사 부인은 이혼을 하고 화가와 결혼했다. 딕스를 행복하게 해준 손자는 그 소생이다. 아내를 빼앗긴 의사는 재혼을 했는데 전 부인(화가의 부인이 된)의 언니와 결혼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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